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는 만18세이후 국방부 소속으로 편입되어 국방의 의무를 해야한다. 그 시절에는 현역, 방위, 면제로 분류되었고 구분은 신체등급으로 나뉘었으며 국방부의 착오로 면제받는 사람도 만명에 한명꼴로 나왔다.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만20세에는 군대에 입대하고 삼년동안 입대하라는 소식이 없는 사람은 군면제를 받았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육,해,공군이 있으며, 공수부대,특공대,해병대,헌병대라는 곳도 있다.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에 공병을 담당하는 부대가 있으며, 소속된 부대나 그 규모에 따라 역할이나 명칭, 편성도 제각각이다.
공병부대
각 군단 공병여단: 군단 예하 공병여단으로 편성되어 군단 예하 부대들에 공병지원을 하고 있다.각 군단 공병단: 군단 예하 공병단으로 편성되어 군단 예하 부대들에 공병지원을 하고 있다.각 사단 공병대대: 사단 예하 공병대대로 편성되어 사단 예하 부대들에 공병지원을 하고 있다.
1995년 전문대학교 토목괴를 졸업후 방위산업체나 병역특례 업체로 들어가지 못하여 1995년 11월 29일에 경기도 의정부에 있었던 306보충대에 입소 하였다. 경기도를 담당하는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예하의 사단 신교대로 보내기 전 '장정'들을 분류하고 대기시키던 곳이다.

모집병이나 특수병, 징집병 관계없이 입영처가 제2작전사령부 관내 사단 신교대가 아닌 '306보충대'로 받았다면 이곳에서 입영하기 위해 집결해야 한다. 이곳에서 대기하는 입영 장정들을 3박 4일간 관리한 다음, 각 사단 신교대로 보내는 게 이 곳의 주 기능이었다. 덧붙여 후반기교육을 받고 3군 예하부대에 배치받은 이등병을 잠시 모았다가 각 사단 보충중대로 보내는 역할도 했다. 입영장정이 3박 4일간 머무르고 있으면 각 사단 교육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내가 탄 버스에는 수도기계화 보병사단인 호랑이 마크가 있었고 가평군 현리에 있는 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고 4 주간 훈련후 철원 평야 바로 밑에 위치한 영북면 운천리에 있는 제1기갑여단 공병중대로 배치되었다. 공병은 폭파, 지뢰,야전공병으로 분류되며 기타 목공.전기공,타일공과 수송병 들로 구분된다. 부대에 어느 정도 적응되면 제5공병 여단으로가서 주특기 교육을 받는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사람은 주특기 교육까지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다.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 군대이다. 공병은 건설회사라고 보면된다. 아침에 구보하고 체조하고 군인들의 편의를 위해 길도 만들고, 집도 만들고, 집안, 지붕,책상, 문,의자등을 만들었고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골프 퍼팅대, 물레방아, 수납장등을 만들어 준다. 목공, 전공,타일공들이 제일 바쁘고, 나머지 인원들은 삽질과 훈련이다.
1996년도 7월, 철원군이 속한 강원도 북부 지역 및 경기도 일대에서는 1996년 7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국지성 집중호우가 자주 있었다. 그 결과 7월 26일부터 7월 28일까지 3일간 수해가 많이 발생하였고 대참사를 가져왔다.

1996년 7월 26~28일에 걸쳐 경기도 북부 (파주시, 연천군 등)와 강원도 북부(철원군, 화천군, 춘천시, 인제군 등)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심지어 북한 지역의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철원군의 경우 7월 26~27일 단 2일만에 492.8 mm의 폭우가 쏟아졌다.
아무래도 이 일대가 전방지대라 군부대 쪽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특히 군부대가 있는 곳은 대체로 산골짜기 쪽이 많은지라 다수의 군부대 막사가 산사태로 매몰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사망·실종된 군인 수만 60여 명에 달했다.

당시 KBS 2TV에서 방송되었던 병영드라마 신고합니다도 이 수해로 인해 촬영에 차질을 빚었다. 특히 이 드라마의 주요 세트장 중 하나이던 '할머니집'이 수해로 유실되었다. 이 드라마 13회에서 부대가 비 피해를 입는 장면과 할머니집이 유실되어 탁주군단장 할머니(김지영 분)와 고은실(이혜영 분)이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집중호우가 한탄강과 임진강으로 흘러들었고, 한탄강 하류에 있던 작은 규모의 연천댐이 붕괴되면서 임진강 하류의 문산 일대를 직격했다. 저지대에 시가지가 있던 문산은 3 m 깊이로 물에 잠겨버렸고, 시가지 전체가 거의 초토화되는 피해를 입었다.
붕괴된 연천댐은 철거하고, 현재는 그보다 약간 상류에 훨씬 더 큰 규모의 한탄강댐을 건설하였다.(2016년 완공). 다만 댐이 완공될 때가 되니 이번엔 몇 년째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어서 본래 홍수 조절만을 위해 건설되는 댐의 용도를 가뭄 대비도 가능한 다목적댐으로 바꾸어 달라는 요구가 있다.
여담으로 이 폭우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이 자원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폭우로 북한 역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공식 사망자만 116명에 달하며 이재민은 327만 명에 달했다. 특히 황해도 일대의 경작지들이 폭우로 침수되어서 북한의 곡식 생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안그래도 고난의 행군으로 악화되던 북한의 식량사정에 일격을 가하게 되었다.

호우 기간에 내린 총강우량은 철원 527㎜, 연천 687㎜, 화천 427㎜이었으며, 철원군에 내린 시간당 최대 강우량은 43㎜[7월 26일, 7~8시]이었고, 1일 최대 강우량은 268㎜이었다. 철원군 산간 지대에서는 3일간 내린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하여 다수의 인명 피해 및 하천제방 붕괴에 따른 농경지 매몰로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대규모 수해는 서해상에서 유입된 고온다습한 수증기가 차가운 공기와 부딪치며 7월 24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집중호우에 기인한 것이었다. 1996년 7월 24일부터 시작한 집중호우의 강도 높은 강우로 인하여 산사태가 발생하여 산간 계곡이나 평야에 위치한 군부대 막사가 매몰되었다. 동시에 철원 이북 지역의 홍수가 남쪽으로 유입되면서 침수 및 유실되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7월 26일 새벽 2시경 철원읍 대마리 육군 5사단 최전방 초소의 막사가 매몰되어 20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철원군 근남면과 인접한 화천 쪽 말고개에서도 산사태로 제15사단 장병 21명과 지역 주민 14명이 사망하였고 실종되었으며, 군부대 탄약고의 지뢰 등 수많은 폭발물이 유실되었다. 7월 26일 물이 더욱 불어나 고석정 고석바위는 급류에 모두 잠기었고, 승일교 다리 전체가 흔들렸다. 게다가 7월 27일 오전 5시 30분경에는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소재 육군 공병부대 막사 주변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여 대대 막사 2채를 덮치면서 8명이 사망하였고 4명이 실종되었으며,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96년 7월 26일부터 27일까지 이틀 동안 약 430㎜의 폭우가 내렸다.
1996년 7월 26~28일에 걸쳐 경기도 북부(파주시, 연천군 등)와 강원도 북부(철원군, 화천군, 춘천시, 인제군 등)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심지어 북한 지역의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철원군의 경우 7월 26~27일 단 2일만에 492.8 mm의 폭우가 쏟아졌다.

부대가 공병이며 철원 근처라 대민지원을 나가서 축사 지붕들과 토사가 유실되어서 붕괴된 곳을 메꾸는 작업들을 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던가.예하부대는 3,5,6,8, 제1기갑여단, 제5공병여단, 등등이 있었는데 유격장은 6사단에 위치했었다. 유격장의 약 30%가 없어졌고 사열대가 떠내려 갔다. 유격하러 가서도 일을 해야 했다. 그 당시의 일반병으로 지원한 사람들은 다 만능이었고 사병들은 특히 공병은 삽질과 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가을을 맞이하였다.
군대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2가지 형태로 대응한다.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 당시의 기억으로 데프콘 1,2,3단계이다. 1994년 7월 8일 대한민국에 전쟁 발생 전의 단계가 되었 다. 친구들의 이야기다. 친구들의 군대에 있었던 1992~95년 사이다. 북한에 적벽가라는 곡을 3절까지 부르면 전쟁이 발생한단다. 그해 김일성 주석의 죽음으로 3절까지 불렸으면, 정규 방송에 자막으로 휴가 중이거나 외출 중에 있는 전체 장병들은 군에 복귀하라는 방송이 나왔고 병장 후가 중인 제 친구는 밥을 먹다가 복귀하였고, 국군 회관에 머리카락을 잘라준 친구는 훈련소에서 총을 잡아본 후에 총을 처음 잡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돗개 1,2,3단계는 북한의 간첩들이 침투하는 동선을 막기 위해 이동 동선에 걸친 부대는 실탄을 지급받고 초소나 산에 투입되어 간첩을 잡는다. 1996년 9월 18~11월 5일 동안 진돗개 최고 상위 단계였다. 국군 11명과 경찰, 예비군 2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었다.

1996년 가을 강원도를 뒤흔들었던 무장간첩 침투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이 사건에서 떠올리는 단어가 있다면 ‘반복’이다. 분단 시대의 남과 북은 지겨울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유지 반복해 왔다. 그것은 이른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6년 송이버섯을 캐러 들어간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한 곳은 1968년 이승복 어린이 가족이 죽음을 당했던 곳에서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30년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상황과 루트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것이다.


군대에서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망치를 잡았고 삽질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훈련 약간, 사격 조금
이렇듯 우리나라의 국방의 의무를 졌던 625 참전 선배님들과 월남전 참전용사와 해외 파병 중인 장병들과 지금도 자주국방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국군 장병들의 수고 아래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행복을 꿈꾸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약간의 잘못된 부분이 있을지라도 격려하며 박수를 쳐줘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쓰디쓴 말보다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