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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選擇 서울 상경기(20세의 선택)

멋째쟁이 2024. 3. 21. 21:52

선택의 사전적 의미는

1. 여럿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골라 뽑음. 선택 기준. 선택 사항.  

2. 생명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하여, 생물 가운데 환경이나 조건 따위에 맞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죽어 없어지는 현상. 자연선택과 인위 선택으로 나눈다.  

3. 심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을 의식하고,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골라내는 작용.  인생은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90년도 이휘재 씨가 했던 인생극장에서 두 가지의 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을 선택한 미래를 보여주는 프로가 있었다.


인생은 답이 없다. 선택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돌아가서 처음 위치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있겠고, 중간중간마다 방향을 뒤틀어서 처음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면 방향을 전환해서 차선으로 가는 경우도 있겠다.

실패의 실패를 거듭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더욱더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선택한 것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모르는 것의 연속인 우리의 삶이다. 단지 선택하면서 '후회를 하느냐, 만족을 하느냐'다 만족을 한 사람은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잠을 4시간 밖에 자지 않고 어떤 일에 집중하고 또 집중을 했다고 하자. 그 일이 잘못되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선택한 것에 방향성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알기 쉬운 음식점을 차렸다고 보자.

어떤 종류이며, 주변에 상권과 이동성 그리고 최우선으로 맛이 좋고 가격이 저렴하고 , 사장의 마인드와 손님에 대한 직원들의 서비스 다시 올 수 있게 만들 만한 것을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된다.

맛있게 하려면 맛있는 집에서 일을 해서 적어도 2~3년 이상 배우고 그 맛보도 더욱 맛있게 하고, 서비스가 좋은 집에서 서비스를 배우고, 함께 할 직원들의 인성을 교육하고 손님에 대한 배려가 있으면 성공을 못 할 이유가 없다.    

이렇듯 살아가다 보면 많은 갈림길에 놓인다. 우리는 하루에 200개 이상의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하는 선택이 있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선택도 있겠습니다. 아침 일어나는 순간부터 일어날까 말까에서 5분만 더 자야지 하는 선택의 연속인 삶을 살아갑니다.  

제가 살았던 선택의 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1992년도까지는 수능 시험이 아닌 학력고사의 시대였다. 1991년 고3 때에 체력장 시험쯤에 매장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력고사의 시험의 보고 전라북도에 있는 원광대학교 체육 교육 학과를 보았습니다.

시험은 합격 수준이었는데 체력시험에서 2개(유연성 및 제자리 높이 뛰기)에서 과락(합격 기준의 아주 밑부분)을 맞았다. 100 m, 오래 달리기, 턱거리, 윗몸일으키기는 만점인데 두 가지가 낙제였다. 그 학교에 떨어지고, 후기대학은 선택하지 않았고, 전문대 시험을 보았는데, 맞은 점수와 커트라인을 보았을 때는 점수가 10점이 높았는데  떨어졌다. 어, 이거 뭐지, 답안지를 빌려서 작성하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도 그렇게 2~6월까지 시골에서 아버지의 수박농사를 도와주었다.  태어난 해보다 1년이 늦게 신고되어 취업 및 재수는 농사를 도와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고창이고 그 시절에는 거의 모든 밭에 수박을 지었고, 일부 고추, 일부 담배 농사였습다. 논농사 6,000 평 수박농사 6,000평 이었습니다.

고창수박밭



고등학교 동창 어머니는 2~3만 평 정도의 수박 농사만 지었습니다. 그 해 비가 오지 않아서 무지 더웠으며, 수박은 이름 그대로 물이 아주 많이 필요 하지만 배수(물이 고이지 않게)가 좋아야 합니다. 수박이 어느 정도가 되면 평당 가격으로 판매합니다.

그때 수박 가격 한평(2개)에  6,200원  평균 가격이 5,000원이었으니 수박이 어느 정도의 크기 인지 설명하면 판매되는 최상품의 기준이 11kg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정성이 들어간 수박은 17kg 정도이었습니다. 이것을 차에 실으면 11kg 이상은 대략 700개 정도이며 저희 집 것은 600개 미만입니다.  

아버지께서 땅을 조금 허락해 주셨으면 영농 후계자를 할 생각도 있었는데, 4형제 중 막내였고 날 너무나 좋아하셔서 하지 말라고 하셨다.

수박 농사 후에 서울로 상경해서 간 곳은 강남구 삼성동에 조선일보지국 그곳은 그 당시 신문 배달권에서 최고로 배달을 많이 하는 곳이었습니다. 삼성 무역 센터를 들어가는 배달원은 대략 900부, 평균 사람은 약 600부 정도이며, 전단지를 넣고 배달하면 약 삼십오만 원 정도 받았다. 대략 3~4시간 일을 했다. 1992년도 최저시급이 925원 ×10시간 ×30일=277,500원이었다.

무역센터
삼성동위치



그 후에 정보처리기능사 시험을 위해 학원을 다녔고, 저녁에는 논현동에서 저녁 7시 30에 목욕탕에 가서 때밀이 아저씨 목욕탕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고 약 25만 원을 받았다. 시간은 약 2시간을 했다. 때밀이 아저씨가 자기 대신 때를 밀고 약 300 만원을 버는데, 150만 원만 자기에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쓰라고 했었다. 나이를 먹어서 힘에 부친다면서 말이다.

삼성동일대 현재목욕탕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잘 몰랐다. 생각적으로 5~6시간 일하고 60 만원 정도 받은 것이 많이 버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때 때밀이 아저씨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떼돈(때를 밀어서 번돈)을 벌었을 것이다. 적어도 서울에서 집을 사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해는 강남 압국정동에 오렌지족이 많이 주도했다.

압구정및 신사동 위치

압구정거리모습
92년도 드라마 질투


오렌지족은 1990년대 초 강남에 거주하는 부자 부모를 두고 화려한 소비생활을 누린 20대 청년들을 가리킨다. 부유한 부모가 주는 넉넉한 용돈으로 해외 명품 트렌드를 소비하고 고가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유흥을 즐기던 젊은이들의 과소비 행태를 비꼬는 말로, 한때 과소비의 대명사로 쓰였다. 특히 오렌지족은 부에 넘치는 사치품이라 할 수 있는 외제차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오렌지족의 차량
오렌지족의 차량


이들은 외제차를 이용해 등교했고, 데이트나 쇼핑 같은 일상생활도 했다. 이는 국내 자동차 시장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90년대 초 자가용이 부를 과시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등장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오렌지족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수입 과일인 오렌지가 해외 명품을 소비하는 이들의 행위와 유사하다 하여 만들어진 말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들이 고가의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거리에서 여성들을 유혹할 때 오렌지를 들고 있었다 하여 붙여진 말이라는 설도 설득력 있다.  

1990년대 초반 원조 오렌지족들은 압구정동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이들이 새로운 문화를 찾아 홍대 쪽으로 모이면서 홍대의 고급 카페 밀집 구역인 피카소 거리가 생겨났고, 이 거리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들의 파티 문화가 유입되었다.  

그때 옆에 신사동에서 주방보조를 했었다. 압구정에서 놀던 오렌지족들이 새벽에 문을 여는 집을 찾았는데 내가 다녔던 식당이 밤에 몰래 문을 열고 장사를 했었다. 그때에는 새벽시간에는 식당이 문을 여는 곳이 없었다.    

그해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신드롬을 일으킨 해다.

서태지와 아이들


11월에서 12월 달에는 서초구 포이동에서 단란 주점에서 서빙을 했었다.

사장님이 3분인데 남매들이었다. 첫째인 큰형은 감옥에서 출소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손님들은 전국구  보스들이 많이 왔었고, 둘째인 누나는 일본 손님이 많았다. 한국에서 모델을 하다가 일본에 있다가 왔다고 했는데 여하튼 일본 손님이 주류였다. 셋째는 막내 사장님은 모델같이 키가 187cm 정도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제비족 같았다. 매일 여자 손님만 왔었다. 동네 바로 밑에 집 친구랑 서빙을 보았었는데 그곳을 그만둔 날은 잊어버릴 수가 없는 날이다.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난 73년에 태어나서 74년생으로 출생신고가 되었고 친구는 74년 2월에 태어나 72년생으로 되어 있었다. 시골이 연고지이어서 김대중 후보께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사장 몰래 선거하러 시골에 내려갔다. 친구랑 같이 해도 큰 사장님께 혼나기 일쑤였는데, 사장님께서 하는 말 "야, 네 친구 오지 말라고 해라."오면 죽인다고 했었다.

덜컹 겁부터 났고 그날 장사하기 전에 옷가지를 사고 그냥 야반도주를 해서 시골로 내려왔다. 12월 18일은 더하면 30 반대로 하면 영삼이 된다.

선거후보및 선거일


14대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 되었고 나 시골로 내려왔다.

대통령 김영삼


그해에는 마지막 학력고사 시대로 문제가 너무 쉬워서 만점자가 무지 많이 나온 해였다. 학력고사는 보지 못해서 전기와 후기는 원서를 못 냈고 전문대 시험을 공부를 한 달이나 했을 것 같다. 원래는 굴삭기 조정사 면허증을 따려고 했다가 학원 접수일이 3월이어서 2월에 있는 전문대를 보았는데 합격을 한 것이다.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했는데 합격이 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잘했고 영어는 중학교 때 사전을 2번 잊어버린 후에 영어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합격을 해서 전문대학이라는 곳을 다니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1년의 인생  20세의 1년이라는 생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흘러간 삶이었다.

바랬는데 되지 않았고 바라지 않았는데 되어버렸다.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던 혈기 왕성한 시골 촌놈의 서울 상경기이었다.  

잠언 16장 3,9절 말씀.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