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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이 천심 (성공의 함정을 조심하라.)

멋째쟁이 2024. 5. 1. 18:08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
1) 주의 음성을 듣는 마음
2)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것(백성을 위하는 것) 사람과 영혼을 사랑해야 한다.


열왕기상.
1장 아도니야의 왕권도전과 솔로몬의 왕위 계승,
2장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왕권 강화,
3장 솔로몬의 지혜와 재판,
4장 왕국의 번영과 솔로몬의 지혜,
5장 솔론몬의 성전 건축준비,
6장 솔로몬 성전 건축,
7장 솔로몬 왕궁 건축과 성전 부속 성물 제작,
8장 솔로몬 성전 봉헌식,
9장 성전 봉헌을 받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
10장 스바 여왕의 방문과 솔로몬의 부귀영화,
11장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12장 왕국 분열과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솔로몬의 재위는 40년 이었다. 그중 성전 건축7년,왕궁의 건축 13년, 이방나라에서 일년에 조공으로 바친돈이 1년에 약 2조 사천억원이었다.

그러하지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고, 나라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섬겨야 하는 왕이다. 그런 그가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긍휼히 다스려야 했던 왕이 형락과 사치를 하고, 백성들의 삶에 고역을 주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지 않는삶,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아 가는 인생의 끝은 나라의 멸망이다.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성공의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마음을 잘 헤아릴줄 아는 사람

퇴계 이황.    

하루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왔다.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했다.

그런데 식사가 문제였는데 저녁상에는 보리밥에 콩나물국, 가지잎에 명태무침이 차려져 있었다. 이황은 다른 때와 달리 명태무침이 나왔으므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권철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아 식사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권철은 일정을 앞당겨 도산서원을 떠나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에 권철은 떠나기 전 이황에게 "마지막으로 선생께 좋은 가르침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라 청하자, 이황은 옷깃을 바로하고 말했다.

"대감께서 이 먼 곳까지 찾아 주셨는데 융숭한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감께 드린 식사는 일반 백성이 먹는 것에 비하면 성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감께서 식사를 못 하시는 것을 보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정치의 근본은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관과 민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앞으로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 이에 부끄러워진 권철은 얼굴을 붉히며 "참으로 좋은 가르침입니다.

백성에게 다가가는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후 권철 본인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민심이 천심! 정약용이 실현한 목민관 행정!!

정약용은 형수의 동생이었던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약용의 벼슬길에 언제나 반대파의 상소꺼리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와 단절하였음을 절실하게 해명하는 상소문인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올리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비난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조 임금은 잠시 공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36세 때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냈습니다.

조정에만 있다가 그는 목민관으로 처음 한 고을을 맡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백성들의 생활상을 확인하고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임하던 길에 그는 첫 번째  고개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계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앞서 전임 곡산 부사 때 서리들이 농간을 부려 포군(砲軍)을 위한 세금으로 면포를 걷어야 하는데 그 대신에 돈으로 몇 배나 걷어들이자, 이계심이 백성들 천여 명을 이끌고 관아에 나와 항의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동자인 이계심을 붙잡아 형벌로 다스리려 하자 백성들에   둘러싸여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관아에서 군사를 동원해서 체포하려 하였으나 붙잡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정약용의 부임길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곡산의 서리들은 자수한 이계심을 포박하여 끌고 갈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계심을 관아로 데려가서 정식으로 심문토록 하였습니다.

심문결과 모든 것이 거짖이 아님을 알게된 정약용는 이계심을 무죄 방면하였습니다. 그는 무죄방면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관청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데 교묘하기만 하고,  폐단을 들어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주고 사야 할 것이다”(自撰墓誌銘 集中本).

정약용의 첫 번째 고개는 고을 전체 주민들에게 이제까지 보지 못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폐단을 고치기 위해 관청의 행정에 저항하는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절실하다는 새로운 의식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관청은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살길을 열어 주는 것이 바로   관청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곡산부사 2년 동안 역사에 남는 치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목민관으로서 쌓은  치적은 바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 과연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먼저 제도 개혁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척도의 기준인 자(尺)의 길이를 정확하게 정하여 백성들이 바치는 포목의 부담을 덜었습니다.

왜냐면 아전들이 자의 길이를 속여 백성들의 부담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좌표 도는 첨기부(家坐表 : 砧基簿)' 라고 하는  호적일람표를 창안하여 아전들이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경위선(經緯線) 위에 지도를 그려 마을마다의 넓고 좁음은 물론 사람들의  거주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여 공평한 조세부과를 부과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행정 개혁으로 관청의 공금으로 타 지역에 가서 면포를 싸게 사들여 중앙에 세금으로 바치고 백성에게는 싼 값으로 분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조판서가 곡산에서 양곡으로 바쳐야 할 세금을 시가의 두 배가 넘게 돈으로 바치도록 지시하자, 민생을 위하여 이를 거부하여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조정 대신의 지시에도 맞서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 규정을 무시하고 몇 배가 되는 꿀을 황해도 감영에 바쳐왔던 관례를 깨고 규정대로만보내도록 하여 상급 관청의 요구도 거절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조정에서 글만 알았던 선비에서 민생현장을 보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도와 행정 개혁을 통하여 백성들이 불합리하게 당하고 있는 것들을 제거하여 백성들이 보다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베푸는 데 심혈을 기울인 목민관이었습니다.  이러한 목민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은뒷날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에서 목민관의 실무과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설득력 있는 저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의학서인 마과회통(麻科會通)으로 천연두의 치료법을 정리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가장 큰 과제의 하나를 해결하였습니다.

그가 종두법의 연구에 노력하였던 것도바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겠다는 뜻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는 또 농업진흥을 위한 논문이라고할 수 있는 응지론농정소(應旨論農政疏)를 저술하였습니다.

이는 정조 임금이 널리 농사에관한 서적을 구하라는 왕명을 내리자, 이에 응하여 올린 상소로서 농업정책의 혁신을  집약하여, 기술계발로 농사를 편리하게 하는 '편농(便農)과, 행정제도로서 농민을 이롭게 보호하는 ‘후농(厚農)과, 농민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주는 '상농(上農)의 세 가지를 기본강령으로 제시하였습니다.

200여 년 전 한 고을의 수령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이룬 다산의 치적을 살펴보면 오직 민생이 우선이었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는 것을 실천한 목민관이었습니다. -다산TV 에서